세월아,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나를 더 아프게 해라
오래된 꿈과 비밀을 간직한
부드러운 사람이고 싶어
부드러움은
망가진 것을 소생시킬 마지막 에너지라 믿어
밥, 사랑, 아이.. 부드러운 언어만으로도 눈부시다
삶이라는 물병이 단단해 보여도
금세 자루같이 늘어지고 얼마나 쉽게 뭉개지는지
그래서 위험해, 그래서 흥미진진하지
황혼 속에선 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일만 오천 년 전 라스코 동굴 벽화의 검은 황소다
황소를 그린 자의 마음이다
생존의 서러움이 득실거리는, 풍요를 기원하는 심정
막 희망의 빈민굴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있어
으리으리한 디지털 인간, 상추 한 잎만한 사람, 별게 아녔어
다들 부서지기 쉬운 밥그릇을 싣고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맨다
행복, 그게 뭔데? ......카푸치노 거품 같은 것
누군가 명품, 성형수술, 다이어트에 빠지는 동안
너는 죽음보다 깊은 외로움에 빠지거나
연애 골짜기에 빠지거나 독서에 빠질 거야
나는 유통기한이 없는 시의 마력에 빠져
천 년 후에도 다시 튼튼한 한국 여성으로 태어날 거야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나를 더 아프게 해라
이렇게 되뇌며 언어의 엽총을 겨냥할 거야
너도 환장하겠니 나도 환장하겠다
뭔가 사무치는 게 있어야겠어
해방감을 주는 거
징 하게 눈물 나는 거
신현림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