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남는 이야기

우울이란~?

리즈hk 2008. 9. 22. 13:14

1.우울이란 안개너울이다. 
흐린 풍경으로 달아나고 있는 자기 전신(全身)을 바라보는 일이다. 
눈을 슴벅거리며 바라보면 차고 눅진한 물기들이 맺혀온다. 
삶은 흐리고 인식은 어둡고 시간은 느리다. 우울은 존재를 혼자이게 한다. 
어쩌면 쓸쓸한 삶의 미장센이다.
고립된 자아를 스스로 껴안는 순간 불안이 몰려온다. 
보이지 않는 사방에서 차가운 얼굴을 한 복병(伏兵)들이 전진해오고 있다.
그의 심장과 눈, 이마, 복부, 등, 어깨죽지에 창을 겨누고 덤벼들 것이다. 
저 보이지 않는 것들 중의 하나가 그의 목을 치리라. 
2.우울은 젖빛이다. 
어머니의 젖을 물고 잠들던 날들로 회귀하고 싶은 욕망이다. 
삶을 가위질하고 싶다. 그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살았던 것들에 대한 단호한 부정(否定).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세찬 고개흔듬. 우울은 흘러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을 지우는 지우개이다. 
그 젖빛 공간에 다른 무엇을 채우려는 생각은 없다. 
3.우울은 침묵의 수다이다. 
침묵과 침묵들이 긴 시간을 두고 교환하는 대화이다. 
어쩌면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아무 것도 대답하지 않는, 
두 개의 자아가 내뱉는 불연속적인 독백들이다. 
깊이 응시를 하고 있지만 어쩌면 외면과도 같은 응시이다. 
낯설고 어색한 긴장이 그 두 얼굴 사이에 감돈다. 
저 홀로 떠들고 있는 라디오에선 곧 비가 올 것이라고 예보한다. 
비가 온다고? 기가 막히다는 듯 두 개의 침묵이 서로를 노려본다.
4.우울이란 느린 침몰이다. 
단단하던 지반이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침하한다.
어디까지 내려갈지는 모른다.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다. 
이 상황을 벗어나야할 이유도 발견할 수 없다. 
그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 뿐이다. 붙잡을 수 있는 단단하고
믿을 만한 건 없다. 움직일 수록 더욱 깊이 처박힐 것이다. 
침몰을 두려워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함부로 이 침몰을 방해하는
구조자가 있을까봐 걱정이다. 악어들이 꿈틀거리는 저주받은
늪지 속으로 천천히 들어간다. 수면 위에 가득 낀 푸른 물풀들을
헤칠 때 뻑뻑한 물살들이 파문도 없이 갈라지며 무거운 몸을 받아들인다.
5.우울이란 그림자이다. 
한 존재가 사라진 자리엔 납처럼 무거운 그림자가 앉는다. 
그림자는 결코 말을 걸지 않는다. 웅크리고 앉아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볼 뿐이다. 그림자는 크고 확실하지만 그는 작고 확실하지 않다
삶의 수면에 어지러운 부유물(浮游物)들. 뿌리깊은 죄책감. 
자기를 쏴버리고 싶은 분노. 우울은 그림자가 보낸 밀정(密偵)이다.
그는 그림자의 고문을 당하고 있다. 
우울은 가학적인 초자아. 너무 엄격하게 집행된 자아이다.
6.우울은 뼈없는 정신의 불면이다. 
콧 속 깊숙히 스며드는 향기. 그는 눈을 감을 수 없다. 
정체 모를 눈알들이 번득이며 그가 잠들지 못하도록 불침번을 선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내가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살아온 것은 하나의 쓰레기더미가 아닌가? 
내가 죽은 다음의 저 무심과 평화는 지금 내게 어떤 의미를 던지는가? 
그의 몸 속에 들어있던 해골과 뼈대들이 슬금슬금 몸을 빠져나가
나를 보며 팔장을 낀채 질문한다. 너는 무엇인가. 나는 말한다. 
나는 너다. 그러나 그는 인정하지 않는다. 너는 나일 수 없다.
해골의 단호한 말에 기가 질려 나는 물러선다. 
너는 나의 일부야. 그러자 그는 비웃으며 나를 떠민다. 
나는 비닐봉지처럼 주저앉는다. 핵겨울 기나긴 잠없는 밤이다.
7.우울은 뒤늦게 배달된 최고장(催告狀)이다. 
배달 일자에 이미 심각한 경고였으나 그것이 뒤늦게 배달됨으로써 
어떤 조치를 취하는 일이 불가능하게 된 상태이다. 
그것은 종종 질병에의 경고이거나 정신에 눌러앉은 
종양(腫瘍)에 대한 진단서이다. 
아직 아픈 곳이 없는데? 꾹꾹 몸을 눌러보면 아무런 통증도 없는, 
그러나 몸이 바스라질 것같이 허하게 느껴진다. 
괴로움을 잊으려면 그 괴로움을 생산하고 있는 자기 몸을 박멸하는 
일 밖에 없다는 점을 깊이 자각하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울은 정신 의 통증 부위에 긴급히 주사한 마취제이다. 
걱정마십시오. 일은 금방 끝날 것입니다. 회백색 천장을 바라보며
몽롱해지는 기운을 느낀다.
8.우울은 권태라는 이름의 친구이다. 
반갑지는 않지만 어김없이 찾아오는 친구라 기다려지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찾아오면 꼼짝없이 시간을 그에게 내줘야 한다. 
먹는 즐거움, 잠자는 즐거움, 섹스하는 즐거움마저 그는 거둬간다. 
그의 지루하고 의미없는 얘기를 들어야 한다. 
어쩌면 내가 할 이야기를 선수를 쳐서 얘기하고 있을 뿐이다. 
가끔 그는 자살을 권하기도 하지만 진심으로 권하는 건 아닌 듯 하다.
더 살 만한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다.
폐경(閉經), 길이 캄캄하게 닫혀있다. 
9.우울은 차례를 잊어버린 계절이다. 
계절과 계절 사이에 낀 계절이다. 그 계절이 오면 다른 계절들은 
모두 그 계절이 되어버리는, 만연되는 증상같은 것이다.
두려움과 낯섬. 삐걱거리는 기분.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같은 귀에 익은 소리들.
우울은 햇볕 잃은 날들의 퀴퀴한 내면이다. 
그저 이유없이 찾아왔다가 돌연 사라져버리는 친구. 
그러나 우울은 암(癌)처럼 살이보다 더 오래가는 
정신의 기생식물이다. 
/ 빈섬

Carino (사랑-스페인어) / Chris Sphee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