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야기

미래 천년을 여는 새만금

리즈hk 2011. 10. 1. 10:26

 

역사상의 거대 건조물들은 그 시대의 '사회적 욕망'을 기록한 타임캡슐과 같다. 인류 역사 초기에 거의 모든 문명이 장엄한 신전과 능묘(陵墓)를 축조했다. 거기에는 신과 영혼을 향한 숭배,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고대인들의 갈망이 담겨있다. 진나라부터 명나라까지 끊임없이 축조된 만리장성은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중국문명의 욕망과 불안을 동시에 표상한다.

 

어디 이런 거대 건조물들뿐이겠는가? 몇 해 전 유럽의 한 도시에서 건물에 새겨진 이런 문구를 보았다. "모든 건물은 자기만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그렇다! 모든 건조물은 그것을 축조하고 사용하고 보수하고 허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기록한다. 그러므로 건조물은 단지 물건 덩어리이기 전에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의 생각이고 관념이다. 이렇게 볼 때 새만금 역시 단순한 방조제나 간척지가 아니다. 그것은 지난 20년 동안, 아니 그 이전부터 근대화와 산업화의 길을 걸어온 20세기 대한민국의 사회적 욕망과 생각들을 담고 있다.

 

새만금사업의 연원은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농림수산부는 전북 옥구군 옥서면을 중심으로 금강 · 만경강 · 동진강 하구갯벌을 매립한다는 '옥서지구 농업 개발계획'을 입안했다. 하지만 이 사업은 서남해안 간척사업의 일환으로 논의되는 정도였고, 그 규모도 지금의 새만금보다 훨씬 작았다. 그러던 것이 1987년 5월 느닷없이 '서해안 간척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현재 규모의 사업이 되었고, 그해 7월 '새만금간척 종합개발사업'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지만 당시 경제성 검토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사업추진이 불투명했다.

 

그러던 새만금이 하루 아침에 여당 대통령후보의 선거공약으로 부활했다. 1987년 6.10 민주화운동으로 시행된 대통령직선제의 대선일을 엿새 앞둔 12월 10일, 노태우 후보가 전주에서 새만금사업의 시행을 전격 선언했다. 이렇게 새만금은 20여 년 전 한국사회의 '정치적 욕망'에서 잉태되었다. 한데 모든 선심성 공약이 그렇듯이, 그것은 단기적이고 즉흥적이며 또한 적극적이지도 않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를 현실화하는데 또 다른 정치적 욕망이 개입했다. 호남에 지역기반을 둔 당시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를 중심으로 대선공약인 새만금사업의 시행을 강력히 촉구했고, 호남민심을 의식한 정권은 1991년 정식으로 새만금사업을 기공한다. 그리고 몇 년간 이 사업은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지역을 벗어나면 '새만금'의 이름조차 모르는 국민이 대부분일 정도였다. 그런데 1995년 무렵부터 새만금에 세간의 이목이 쏠리게 된다. 이즈음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환경담론이 펼쳐지면서, 환경전문가들이 새만금사업의 환경파괴적 성격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6년 시화호 사태를 계기로 시민사회단체들이 전면적으로 새만금사업의 중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후 새만금사업은 줄곧 '개발'과 '환경'이라는 시대적 딜레마의 한복판에 놓여있었다. 사업을 추진하는 측과 저지하는 측이 팽팽히 맞서 10여 년 동안 갈등과 논쟁이 계속되었다. 사실 이 논쟁은 거의 백지상태에 가깝던 우리 사회의 환경의식을 크게 높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새만금 환경논쟁은 분명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이 많은 논쟁이었다. 이 논쟁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상상해 보면, 그 답을 쉽게 얻을 수 있다. 새만금사업이 몇 년 앞당겨졌을지 몰라도, 환경을 무시한 개발로 이미 적잖은 문제가 불거졌을 것이다. 1990년대 중순만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환경'은 그만큼 경시되었다.

 

그런데 새만금의 환경운동은 전 국민의 생태 · 환경 지수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새만금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모르는 국민들조차, 새만금을 둘러싼 쟁점에 대해서는 일가견을 가지게 되었다. 3보1배 같은 실천적이고도 헌신적인 생명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생태 · 환경운동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그것은 산업주의에서 벗어나 생명가치를 중시하는 새로운 시대 흐름이 생겨나는데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2003년, 새만금공사 중지를 요구하는 65일간의 3보1배에 연인원 2만5천여 명이 참여했다.
[사진출처: 희망의 갯벌 새만금, http://sos.kfem.or.kr]

 

 

하지만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새만금은 역설적으로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한계와 문제를 드러내는 현장이 되기도 했다. 새만금 환경운동은 우선 지역에서 지역민의 동의를 얻고 뿌리내리는데 실패했다. 오히려 지역을 무시하고 수도권의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환경과 개발을 선/악 이분법으로 파악하고, 환경(내지는 생태)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로 삼는 이념적 독단에 사로잡히곤 했다. 거기에 수반하는 도덕적 우월감도 문제였다. 물론 환경운동에 맞섰던 개발론자들 역시 독단적이고 이분법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대화와 토론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결국 우리사회의 내로라는 논객들이 참여한 담론에서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합의는 도출되지 않았다. 논쟁은 법원으로 갔고, 새만금의 운명은 '사회적 합의'가 아닌 '대법원 판결'로 결정되었다.

 

어쨌거나 새만금사업은 재개되었다. 2006년 4월 방조제의 물막이공사가 끝나면서 새만금은 이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근본적으로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른바 '내부개발' 문제이다. 말하자면 이렇다.

 

 "음! 장애는 사라졌어. 곧 새만금에 새 땅이 생길거야. 근데 이제 여기다 뭐하지?"

 

 따지고 보면 기이한 상황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안에 뭘 만들지도 모르면서 방조제를 쌓은 셈이기 때문이다. 물론 애초부터 사업의 목표는 농지확보였다. 대법원 판결 때까지 이 목표는 공식적으로 유효했다. 그런데 사업이 재개되면서 2007년 새만금 내부의 용도가 농지 대 산업용지 7:3의 비율로 수정됐다. 그러다가 2008년 10월 21일 현 이명박 정부의 국무회의에서 농지 대 산업용지의 비율이 3:7로 뒤집힌 '새만금개발 기본구상 변경안'이 확정되었다. 그 과정에서 전라북도 주도로 새만금 내부개발에 대한 국제공모도 이뤄졌고, 정부의 변경안을 담은 새만금 내부 조감도가 언론을 통해 공표되기도 했다.

 

 

 

새만금 내부개발 기본구상
[사진출처 : 새만금사업단 http://www.isaemangeum.co.kr]

 

 

새만금만의 일이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토목경제의 의욕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한다. 그러니 새만금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국가적 차원에서 축조하는 거대한 건조물에 그 일을 주도하는 사람들의 욕망과 생각이 담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지금 새만금에 긋는 선들이 또한 얼마나 유약한 것인가를 예감할 수 있다. 20년 전 새만금을 잉태했던 '정치적 욕망'은 이미 물거품이 되었다. 새만금개발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대선후보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다시 감옥에 다녀왔고 이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삼보일배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새만금 생명평화운동의 기억도 어느덧 아련해졌다. 농지개발을 주장하던 사람이 산업단지의 필요성을 역설하지만,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벌어진 일이 앞으로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압축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뤘던 지금까지의 수십 년보다 앞으로 10년 동안 더 큰 변화가 있어날 것을 예견한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는 오히려 단기적으로 보인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근본적으로 변곡점에 도달했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오일피크(oil-peak)가 목전에 이르렀고, 전 세계적으로 농업의 중요성이 극적으로 재인식되고 있다. 기름을 펑펑 쓰고 다니는 국제관광의 급격한 감소가 예견되기도 한다. 세계경제와 인류의 삶의 판도가 예전과 전혀 다른 양상을 띨 것이라는 진단이 전 세계에서 숨 가쁘게 쏟아지고 있다. 이런 판국에 지금과 다른 미래를 거의 고민하지 않는, 현재의 욕망에서 새만금에 그리는 선들이 또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지금까지 새만금은 지나치게 '단기적'인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욕망에 의해 아이러니하게도 '장기적'으로 표류해왔다. 또한 사회적으로 충분히 합의할 수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신념이나 지식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독단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이념적 욕망'에 의해 함부로 다뤄져 왔다. 그러면서도 정작 우리 스스로의 지혜를 믿지 못하고, 외국 학자들이 와서 몇 바퀴 돌아보고 그린 안(案)이라야 '국제적'이라고 칭송하는 서글픈 사태까지 감내해야했다. 이 모든 것이 어찌 새만금만의 문제이겠는가? 우리 사회 기성세대의 총체적인 수준과 한계가 새만금에서도 구현되었을 뿐이다.

 

중국 고전인『장자』에 이런 말이 있다. "가까운 들판을 돌아보고 오는 사람은 세끼만 먹어도 배가 든든하지만, 백릿길을 여행할 사람은 전날 밤부터 양식을 준비하고, 천릿길을 떠나는 사람은 석 달 동안 양식을 준비한다." (『장자』「소요유(逍遙遊)」)

하루 먹을 도시락만 달랑 챙겨들고 천릿길을 떠나는 사람이 어리석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하지만 이렇게 쉽고 평범한 진리를 사람들은 종종 잊는다. 장기적 전망이 부족한 사업은 그만큼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게 된다. 새만금 사업은 반드시 거시적인 미래 전략과 더불어 논의돼야 한다. 전라북도의 슬로건처럼 '천 년의 역사'를 준비하는 새만금이 아닌가?

 

그러니 당장의 단기적 욕망에 사로잡히기보다, 우리 후손이 우리보다 더 지혜로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만이라도 진지하게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새만금은 여전히 기회의 공간이고 미래의 땅이다. 그곳은 우리보다 우리 후손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김성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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