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잃어버릴 것을
나에게 잃어버릴 것을 잃어버리게 하여 주시고
나에게 남을 것을 남게 하여 주십시오
와글 와글 타오르던 무성한 여름은
제 자리 자리마다 가라 앉아
귀중한 생들을 여물게 하였습니다
보시다시피
어젠 감당할 수 없이 숨찬 계절이었습니다
이제 돌아갈 것을 돌아가게 하여 주시고
총총히 서 있는
잎 떨어진 나무 수리를 지나는 바람에도
생명을 알알이 감지 할 수 있는
소리 없는 가을을 나에게 주십시오
기름진 미운 얼굴을 거두고
기도를 올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우수수 세월이 지나가는 나의 자리
잃어버릴 것을 잃어버리게 하시고
나에게 남을 것을 남게 하여 주십시오
-조병화-
기다림은 보이지 않는다
기다린다.
죽음을 위해 손 내밀지 않으며
목숨을 지키려고 애걸하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 추수가 끝난 들판에는
눈이 내릴 것을 알고
기다리며
설익은 나를 흔드는 바람에
버티고 섰다.
그래 아직도 기다린다.
이미 정해진 인연의 '그'라면
햇살 따가운 들판에서
나를 추스르며 견딜 수 있고
새들이 유혹에도 초연할 수 있다.
아직 나를 찾지 못한 그와 연결된
가느다란 끈을 돌아보며
순간순간 다가오는 절망조차
아름답게 색칠을 한다.
그리움은 늘 그대를 향해 달려가고
내 기다림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서정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