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남는 이야기

이 해인 수녀가 말하는 '박완서'

리즈hk 2011. 1. 31. 08:22
이해인 수녀가 말하는 '박완서' “저를 당산나무라 하셨던 박완서 선생님 당신은 큰 숲이셨습니다” 지난해 봄이었다. 22일 타계한 박완서씨가 이해인(66) 수녀에게 전화를 했다. “난 다른 이유 없이 오직 수녀님을 보러 갈 거야.” 그 길로 고인은 기차를 탔다. 지난해 봄에도, 가을에도 고인은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2008년부터 암 투병 중인 이해인 수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해인 수녀는 “그때는 선생님(2010년 9월 담낭암 진단)이 편찮으시기 전이었어요. 마치 저의 위로자가 되기로 결심을 하신 듯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고인은 “암에는 흰 살 생선이 좋다”며 이 수녀의 손목을 잡고 일식집에 가서 도미머리 정식을 주문했다. 또 부산 광안리 성베네딕도 수녀원의 모든 사람을 위해 ‘자장면 100그릇’을 사기도 했다. 두 사람은 수녀원 근처의 바닷가도 거닐고, 경남 밀양의 가르멜 수녀원에 있는 이해인 수녀의 언니 수녀를 방문하기도 했다. 서울로 떠날 때 고인은 이해인 수녀에게 카드를 한 장 건넸다. 거기에 자필로 이렇게 적었다. ‘고향에 다녀가는 것처럼 마음의 평화를 얻어 갑니다. 내년 이맘때도 이곳 식구들과 자장면을 같이 먹을 수 있기를, 눈에 밟히던 꽃과 나무들이 다 그 자리에 있어 눈 맞출 수 있기를 기도하며 살겠습니다. (…) 당신은 고향의 당산나무입니다. 내 생전에 당산나무가 시드는 꼴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꼭 당신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나보다는 오래 살아주십시오. 주여, 제 욕심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2010. 4. 16. 박완서’ 카드의 글귀처럼 고인은 먼저 갔다. 올봄에 다시 눈 맞추길 바랐던 꽃과 나무, 또 한번의 자장면 식사는 뒤에 남겨둔 채 말이다.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난 외아들의 생일이 봄날에 끼어 있다며 약속했던 ‘봄날의 부산행’을 뒤로한 채 말이다. 이제 그 자리에는 ‘당산나무’만 덩그러니 남았다. 22일 고인의 당산나무였던 이해인 수녀에게 추모 인터뷰를 청했다. 이날 전화 통화를 할 때 이해인 수녀는 빈소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23일에는 고인의 입관식을 보고 있었다. -박완서 선생님과 무척 가까운 사이셨죠. “연배는 저보다 14년 위세요. 그래도 마음의 갈등이 있을 적에는 ‘고해성사’를 보시기도 했어요. 저 역시 그렇게 했습니다. 선생님은 1988년에 남편과 외아들을 잃으셨습니다. 정말 비통한 슬픔에 잠겨 계셨어요. 그때 저와 친분을 쌓게 돼 더 가깝게 지냈습니다. ‘세상에 사는 우리들은 가끔 수도원에 가서 쉬면 좋고, 제복(수녀복)을 입은 사람들은 가끔 종교적인 분위기를 떠나 사가(私家)에 가서 지내야만 쉼이 된다’고 하시면서, 그런 집이 필요할 적엔 당신 집에 오라고 초대하시기도 했어요.” -마지막 만남은 언제였나요. “지난해 11월 초였습니다. 선생님 댁에 가서 저녁도 먹고, 기도도 해 드렸어요.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나도 이리 힘든데 수녀님은 더 힘들지 않으냐?’고 걱정을 하셨어요. 따님이 차려준 저녁을 맛있게 먹는 제 모습을 아주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기억이 납니다. 가끔 만나면 이별의 아픔, 언젠가는 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조심스레 의견을 나누곤 했습니다. 잘 죽는 것이 과제라고, 어떻게 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안 끼치고 죽을 수 있을까 도움을 청하며 기도해야겠다고.” -수녀님이 가장 좋아하는 고인의 작품은요. “저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를 좋아해요. 제목에 약자를 배려하는 겸손한 따뜻함이 배어 있어서요. 선생님의 작품세계는 숲입니다. 인간의 다양함을 두루 경험할 수 있는 큰 숲 같은 거요. 시든, 수필이든 선생님의 작품은 굳이 교훈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고도, 많은 것을 간접적으로 배우게 되는 매력이 있습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소재를 갖고도 반짝이는 재미를 더해주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습니다.” 빈소에서 고인의 사진을 봤 -을 때는 어떠셨어요. “사진 속의 웃으시는 모습이 어찌나 정겹던지, 막 울다가도 그 모습에 조금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따님들이 저를 붙들고 막 울고 있는데, 시종일관 의연하게 처신하긴 좀 힘들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 혼났습니다.” -‘작가 박완서의 죽음’은 수녀님에게 어떤 것입니까. “정신적으로 크게 의지했던 멘토 한 분을 잃은 상실감입니다. 이 상실감은 오래갈 것 같습니다. 저를 아껴주시던 시인 김광균·박두진·구상, 수필가 피천득, 김수환 추기경님, 법정 스님을 떠나보냈을 적에도 그랬듯이 말이에요.” -고인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를 해주세요. “선생님. 선생님이 떠나신 날 눈이 펑펑 내렸어요. 지난해 봄 우리가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던 성라자로마을 수녀원 돌층계 위에 눈사람으로 서서 선생님을 배웅했습니다. 선생님 목소리처럼 눈은 조용조용 내리는데, 선생님도 흰 눈처럼 곱게 가볍게 가신 거지요? 아름다운 그 나라에서 언젠가 다시 만나요. 편히 쉬세요. 사랑하는 선생님, 안녕, 안녕히!” - 백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