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리틀 야구
홍콩사람들은 야구를 모른다.
그래서인지 야구팀이 없다고 한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큰 녀석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즈음인가보다.
일본아빠들이 주축이 되어 홍콩리틀리그가 형성되어 있고,
삼성과 코오롱에서 스폰스를 하던 한국리틀리그 야구팀이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운동장에서 보내는 바람에 토요일에 있는 성당주일학교에 조인하지 못하는 교우들의 자녀가 있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던 한 아이의 아빠가
신부님께 의견을 내어서 성당이 스폰스가 된 엔젤스 야구부가 생기게 되었다.
초대 이베르나르도 신부님께서 결정하시고 허락이 떨어진 일이었다.
허락은 하셨으나 결정을 하기 전에 신부님께서 귀국하셨다.
그러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신부님께서 떠나시고 나자...
갑자기 나서서 하겠다던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는듯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거국적으로 자기를 바치겠다고 큰소리 치던 위인들이 다 사라지고 없어진 것이다.
신부님 앞에선 충성을 맹세하던 그 형제님들이(내 머리속에 들어있다.)
신부님이 떠나시고 나자 내 몰라라 하는 모습을 보며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의 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성당야구부의 존패 위기까지 오게 되었다.
시작도 하기전에 말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에 황당함마저 들었다.
결국 야구부는 성당 주일학교 소속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주일학교 교장을 맡고 있던 남편이 초대 감독까지 맡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오후까지 성당을 위해서 봉사해야한다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지만
혼자의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어느 날 졸음운전으로 사고를 낼뻔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 반모임에 가서 이런 저런 힘든 점을 이야기 했더니 순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누구에게 오는 일은 순명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자기들에게 오는 일은 이런 저런 이유로 발뺌을 해도 된단 말인가?
그 당시의 뺀질이 같은 어른들이 참 괘씸했었다.
지금이야 추억으로 남아있는 일이지만 말이다.
흠하하하하
큰 아들 성집이는 야구부의 일원으로 등록이 되어 매주 연습과 리그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야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연습을 한다는 것은 정말로 힘든 시간이었다.
그래도 창단한지 3년만에 홍콩 리틀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그동안의 고생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일요일 아침 6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장비를 챙기고 야구갈 준비를 끝낸다.
팀마더가 되는 주일이면 짐은 두배로 늘어난다.
물론 감독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보다 짐가방이 두배이긴 했고
거기다 팀마더가 되는 날이면 보통날보다 두배가 된다는 이야기다.
함께 땀흘리고 함께 먹는 밥맛은 꿀맛이었다.
키가 크지 않아 걱정하던 아이도,,
안 먹어 고민하던 부모도 90%만족하는 나날이었다.
더운 것이 늘 문제였다.
동생들도 함께 운동장을 뛰어다니다 보니 녀석들의 건강도 함께 좋아지는 것 같았다.
둘째 성욱이도 형 덕분에 운동장에서 일요일을 보내게 되었다.
먼지를 마시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말이다.
마스코트 같이 형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말이다.
야구부가 창단이 되고 오합지졸들과 함께 처음 연습을 하고 돌아온 날 오후에
우리는 세상 모르고 잠들었다 밤 늦게야 깨어 저녁을 먹었다.
6개월 정도 지나니
부모들은 힘들어 자고 있을 시간에
아이들은 수영장에서 만나 2차 놀이를 하곤 했다.
그만큼 체력이 좋아진 것이다.
홍콩에서 단체생활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각기 다른 학교를 다니고 학교가 다르니 주일학교에서도 그렇게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걷도는 친구들도 생기는데
야구는 아이들의 결속을 다지는데 한몫을 한 것이다.
성집이는 지금도 그 때의 친구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다.
야구를 시작한지 3년이 되던 해에 나이관계로 야구를 그만두어야 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생일이 늦은 (12월) 성집이는 1년을 더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1년을 더 하고 나면 둘째 성욱이가 야구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는 것이다.
어영부영하다가는 7년 남짓을 일요일에 야구장에서 보내야 하는 일이 발생할 것 같아서,,
성집이가 중학교에 올라가는 이유를 대어 억지로 야구를 그만두게 하였다.
그 당시 투수를 할 수 있는 차례가 되었는데 못하게 된 것을 무척 아쉬워했지만
나의 고집은 꺽지 않았다.
그래서 둘째 성욱이는 야구를 시키지 않았다.
대신 골프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지만 말이다.
나이가 들고 늘 형이 받아왔던 야구선수 모양 트로피에 욕심을 부리던 둘째녀석이
생각지도 않게 아빠와 작당?을 하여 다늦게 야구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때의 일인가 보다.
뒤늦게 들어갔지만 누구보다 잘해서 이웃팀 감독들이,,
메이저팀(중 고등학생들의 팀) 감독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아빠와 나 몰래 일본팀으로 올라가기로 맘을 정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심천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녀석의 야구는 끝이나고 말았다.
당시 녀석의 타율은 9할5푼이었고 팀의 투수였다.
일년도 안한 녀석이 그렇게 되게 된 이유는 아빠와 선배인 형의 몫이기도 했다.
매일 주차장에서 경비아저씨의 눈을 피해
공던지기와 콩배팅(콩을 던져주면 야구배트로 맞추는) 연습이 그렇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 알고 그외는 거의 모르는 일이었다.
세상엔 그저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녀석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지금도 늘 야구에 대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고
형이 받은 3개의 트로피, 그 중 하나는 챔피언 트로피에 대해 부러움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쓰다보니 그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힘들었던 일이 이렇게 가슴뿌듯한 일로 다가오니 말이다.
지금은 엔젤스 팀은 있으나 성당에서 스폰서를 하지 않는다.
약 7~8년전에 새 신부님(이름은 밝히지 않겠다)이 부임하면서 스폰서를 그만두게 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비오신부님에 대해 불만이 있는 것이 이 이유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일이다.
사제라면 이런 저런 일엔 욕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사물놀이 팀을 지원하겠다면서 야구부 지원을 끊어버린 셈이라고 해야하나?
암튼 그랬다.
아쉬운 일이지만 지금은 야구부가 어떻게 운영이 되고 있는지 모른다.
섭섭한 일이게도,,,,,,
아쉬운 일은 그저 아쉬울 뿐이고,,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뿐이다.
ㅎㅎㅎ
2009년 1월 어느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