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함엽서 / 이정하 봉함엽서 잘 지내리라 믿습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이곳에 없는 건 당신뿐입니다. 모든 것이 다 제자리에 있는데 다만 당신만이 내 곁에 없습니다. 비 내리는 오늘 같은 날이면 창가에 앉아 칼국수나 먹었으면 좋겠다,라고 한 그대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슬며시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나요, 당신.. 시 이야기 2010.03.11
사평역에서 / 곽재구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 시 이야기 2010.03.08
비가 와도 좋은 날 비가 와도 좋은 날 옛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은 창 밖에 비가 와도 좋다. 밤은 넝마처럼 시름시름 앓다 흩어져 가고, 자욱한 안개, 님의 입김으로 조용히 걷히우면 하늘엔 비가 와도 좋다. 세상은 참 아프고 가파르지만 갈매기도 노래하며 물을 나는데, 옛 사람이 그리울 때만은 창 밖에 주룩주룩 비가 .. 시 이야기 2010.02.26
봄비 / 이수복 봄비 이 비 그치면 내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 -이수복- 봄이오면 어.. 시 이야기 2010.02.09
바람 속을 걷는 법 / 이정하 바람 속을 걷는 법 1 바람이 불었다. 나는 비틀거렸고, 함께 걸어주는 이가 그리웠다. 바람 속을 걷는 법 2 바람 불지 않으면 세상살이가 아니다. 그래, 산다는 것은 바람이 잠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바람이 약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바람 속을 헤쳐.. 시 이야기 2010.01.14
첫 눈 / 이정하 아무도 없는 뒤를 자꾸만 쳐다보는 것은 혹시나 네가 거기 서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그러나 너는 아무데도 없었다. 낙엽이 질 때쯤 나는 너를 잊고 있었다. 색 바랜 사진처럼 까맣게 너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첫눈이 내리는 지금, 소복소복 내리는 눈처럼 너의 생각이 싸아하니 떠오르는 것.. 시 이야기 2010.01.09
`새해 새 아침` 중에서 / 이해인 광화문 광장(세종대왕동상~탐방로) 언제나 하얀 소금밭에 엎드려 가끔은 울면서 불을 쪼이는 사랑 사랑에 대해 말만 무성했던 날들이 부끄러워 울고 싶은 우리에게 소금들이 통통 튀며 말하네요 사랑이란 이름으로 여기저기 팽개쳐진 상처들을 하얀 붕대로 싸매주라고 새롭게 주어진 시간 만나는 사.. 시 이야기 2010.01.04
너의 하늘을 보아 / 박노해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만 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가는 것은 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시 이야기 2009.12.29
개울가에서 / 도종환 개울가에서 그때는 가진 것도 드릴 것도 아무것도 없어서 마음이 내 전부라 여겼습니다 당신도 마음을 어떻게 보여줄 수 없어서 바람이 풀잎을 일제히 뒤집으며 지나가듯 나를 흔들며 지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물 위에 비친 그대 얼굴 개울물이 맑게 맑게 건드리며 내려가듯 내 마음이 당신을 만지며 .. 시 이야기 2009.12.11
당신과 겨울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 이채 당신과 겨울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면 마음 스친 당신과는 인연 중에 인연이 아니겠는지요 아직 당신을 사랑한다 말한 적은 없지만 당신과 하얀 겨울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당신과 한 번쯤 꼭 가 보고 싶었던 눈 내리는 그곳으로 그곳이 어딘지는 알지 못해도 혼자 갔었던 .. 시 이야기 2009.12.09